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조의 서주 침공 (문단 편집) === [[연주(중국)|연주]](兗州)의 반기 === 「여포전」 주석에 진궁이 조조에게 반심을 품은 이유가 "스스로 의심을 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장막이 도박에 응한 것을 바탕으로, 연주 호족들의 조조에 대한 불만 및 공포와 연주 주민들에게 내재되어 있었던 조조에 대한 공포심이 두 차례에 이은 서주 대학살로 극대화되어 반란까지 이어졌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연주를 빼앗기게 된 계기가 된 서주 침공 당시 『자치통감』에 따르면 조조는 1차 침공 때, 8개월이나 서주에 머물며 도겸을 공격했고, 식량 문제와 전해, 유비의 구원으로 인해 연주로 돌아간 지 불과 두 달만에 다시 서주로 가서 도겸을 공격했다. 이렇게 서주에서 너무 오래 머문 나머지 연주를 직접 관리하지 못해 반란 세력이 결집할 시간적 여유를 주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순식간에 연주의 거의 모든 지역이 반기를 들게 만들었다. 조조가 서주를 공략하는 동안 [[여포]]는 당시 조조의 본거지였던 연주를 공격했고, [[순욱]]이 지킨 3개의 성을 제외한 연주 전 지방이 함락되었다. 연주가 공격당했을 때 연주 호족들과 주민들이 조조에게 반발해서 모반을 꾀했고, [[장막]], [[진궁]]은 [[여포]]와 손잡으며 세력을 키웠다. 당시 여포는 [[원소]]의 객장이었다가 쫓겨나 [[장양]]에게 의탁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고, 진궁과 장막은 당시 조조 진영 내에서 별로 힘 있는 세력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연주를 빠르게 점령하고, 조조를 파멸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것은 조조에게 등을 돌린 연주 호족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국지』 「무제기」와 「장막전」에서 여포군이 무력만으로 점령한 게 아니라 연주의 군현들이 대대적으로 호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 이를 단순히 서주 대학살만의 영향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선 연주 호족들의 이탈은 애시당초 조조가 비록 포신으로부터 연주목으로 추대되긴 했으나, 조정에서 임명된 정식 연주자사도 내쫓은, 원소의 수하로서 연주를 얻은 것에 불과하다는 태생적인 단점이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조조가 [[변양]] 등 연주 호족들을 함부로 잔혹하게 죽여 호족들에게 경각심을 가지게 한 것 또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원소]]의 격문에서도 지적하는 사안이다. 또한 장막이 조조에게 반기를 든 이유는 신변 때문으로 조조가 장막을 옹호하기는 했지만, 조조가 원소의 명에 따라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원소와 조조는 갑을 관계였기 때문이다. 장막은 원소-조조 라인에서 밀려났지만 나름대로의 명성은 있었고, 당시 여포는 군사적, 정치적으로 명성이 높았다. 남부에는 아직 [[원술]]이 건재했고, 북부에는 [[공손찬]]이 조조의 스폰서인 원소와 적대하고 있었다. 진궁이 굳이 잘 나가는 조조의 세력을 박차고 나간 건 세력 내부에서 나가리가 되었지만, 명성과 실력이 있는 자들끼리 힘을 합쳐서 독자적인 세력이 되는 선택지도 한 번 해볼 만한 도박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작금에 천하가 갈라지고 무너져서 영웅호걸들이 나란히 일어나고 있는데, 그대는 1,000리나 되는 지역의 무리를 거느리고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을 맡고도 칼자루를 쥔 채 사방을 둘러보고만 있으니, (다른 제후들과 같이) 충분히 호걸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다른 사람들의 통제를 받고 있으니 어찌 비루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연주의 군대는 동쪽으로 정벌을 간 탓에 (연주가) 비어있습니다. [[여포]]는 장사이므로 그와 싸워서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없으니, 그를 임시로 맞이하여 함께 연주를 다스리고 있다가, 천하의 형세를 보아 때에 따라 사태가 변하기를 기다려 응대한다면 이 역시 한 시대를 종횡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진궁]] 그렇다 해도 반군이 순식간에 동아, 범, 견성 3개 현을 제외한 연주 전역을 장악했다는 사실에서 조조가 서주 전선에 무리할 정도로 많은 병력을 투입했고, 필요 이상으로 서주 체류기간이 길어지면서 반란세력에게 충분한 기회를 허용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무기력하게 연주를 상실한 것이 학살에 대한 반감은 아닐지라도 서주 침공과 학살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일각에서 말하는 서주 지역 학살의 전략성을 반박하는 논거가 되기도 한다. 당장 본거지 연주가 위태로울 정도로 병력을 동원해놓고 서주에서 학살하는 것이 무슨 전략적 판단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비판은 성공적인 전략 판단이 아니었다는 말일 뿐 조조의 학살이 전략적 판단이 아니었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아니다. 전략적 판단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 전략적인 판단 하에 벌인 행위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그런 판단 없이 마음가는 대로 벌인 행위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만약 조조가 서주를 침공해 학살을 벌인 것이 전략적 판단이었다면 필요 이상의 전력을 동원하여 연주를 상실한 결과를 낳은 점에서는 좋지 않은 판단이 되었다. 결국 조조가 194년 다시 도겸을 공격하자 장막의 동생 장초와 진궁 등이 접근해 여포를 불러 그를 연주목으로 세우며 조조와 싸울 것을 권했다. 장막의 높은 명성은 조조에 대한 민심 이탈로 이어져 연주 전역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서주와 연주에서 악명을 쌓고 오랜 기간 연주를 관리하지 않아 반란 가능성을 차단하지 않았던 조조는 일생 최악의 수세에 몰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